후지필름에서 팔았던 ‘MC-007’이라는 카메라입니다.
[포토마루] 실장 [이루님]의 소장품입니다.


MC-007 카메라는 무척 작아서, 오른쪽의 135 필름통만합니다.

아무래도 007의 영향이 큽니다.
디지털 시대가 되어서 이런 필름 카메라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을 것 같긴 합니다만…
기록차 적어둡니다.
독일 회사 미녹스(Minox)는 20세기 중반 라이카나 코닥과는 다른 독자 필름 규격, 8x11mm 판형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필름 카메라”라고 이야기하는 스틸 이미지용 카메라에 들어가는 필름은, 코닥에서 정한 135 format을 따릅니다.
135 포맷은 이미지 크기가 36x24mm입니다.
미녹스판이라고 부르는 8×11 판형은 숫자 그대로 필름에 8x11mm 크기의 상이 맺힙니다.
135의 1/3이 채 안 될 정도로 작죠.

정말 정말 작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www.macodirect.de

135보다도 훨씬 작은 것이 미녹스판입니다.
필름이 작으니 당연히 카메라도 작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미녹스판 필름을 쓰는 작은 카메라들을 “스파이 카메라”라고도 불렀는데, 워낙 작아서 어디든 쉽게 숨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냉전시대에는 미녹스판 카메라를 실제로 첩보 목적으로 사용 하려는 시도가 있긴 했습니다(미 국무부에서 15대 정도를 테스트용으로 구입 했다는 공식 문서가 남아있습니다).
필름 크기도 작고 카메라 크기도 작고 하니까 겉으로 보면 꽤 괜찮아 보이니까요?
하지만 크기가 작다는 장점 하나 빼고는 단점 투성이였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제일 큰 문제는, 판형이 작기 때문에 화질이 대단히 나쁘다는 것.
사진의 화질은 판형이 크면 클 수록 좋아집니다.
조그마한 필름으로는 한계가 뻔하죠.
작은 판형도 판형이지만, 20세기 중반 나오던 필름들은 품질이 썩 좋지 못했습니다.
작은 판형+거친 필름=구린 화질…
사용법을 정확히 익히고 충분한 빛이 있는 환경에서라면 엽서 사이즈 정도 카피는 가능합니다.
미녹스판 카메라들이 “스파이 카메라”로 불리게 된 것은 아무래도 영화 007 시리즈의 영향이 큽니다.
“007 여왕 폐하 대작전(1969년)”과 “007 문레이커(1979년)”에서 등장한 매우 작은 카메라가 미녹스판이었습니다.
1960~70년대에 135 판형보다 훨씬 작은 미녹스판 카메라는 대중들이 보기에는 “최첨단” 문물이었을겁니다.
이런 세간의 이미지와는 달리, 냉전 시대 기밀 문서가 대부분 해제된 최근에도 미녹스가 스파이 카메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은 매우 드뭅니다.
실용성 떨어지는 미녹스판을 첩보 현장에서 쓰기란 아무래도 많은 무리가 있었겠죠.
007 영화처럼 미녹스 카메라로 책이나 문서를 촬영해서 현상, 인화하면 제대로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도 “스파이”들이, 엄중히 보관되어 있는, 깨알같은 글씨들이 빼곡히 적힌 “기밀 문서”를 플래시 펑펑 터뜨려가며 찍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당대의 “카메라”라고 하면 보통은 이렇게 커다란 물건을 떠올리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007이 손가락만한 카메라를 가지고 날뛰는 모습은 굉장히 충격적인 비주얼이었을 겁니다.
사진의 대머리 할아버지는 [안셀 아담스], 촬영은 [앨런 로스].

지금 기준에서 보면 별 것 아니지만,
당시(20세기 중반) 기술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시도였습니다.
이미지 출처: www.macodirect.de
화질이 구리다는 건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화질이라는 건, 현상이 무사히 끝난 이후에 확인 할 수 있는겁니다.
미녹스판은 현상 자체도 어렵습니다.
필름이 작으니 현상 과정에서 노출 사고나 필름이 끊어지는 등의 불상사가 발생 할 확률이 높습니다.
얇고 연약한 필름이 둘둘 말려있는 구조상 현상을 위해 릴에 감는 단계부터 골치가 아픕니다.
조금만 삐끗하면 필름 전체가 못 쓰게 됩니다.
이런 민감한 물건을 스파이 카메라, 즉 첩보용으로 활용하기에는 무리였을겁니다.
중요한 정보를 촬영해서 가져왔는데 랩에서 현상을 제대로 못해서 망…
있었을 법한 이야기죠.

로버트 카파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실제 참여하여 사진을 잔뜩 찍었는데,
현상 과정에서 현상 기사의 실수로 딱 11장 빼고 모두 망해버렸습니다.
남은 11장도 손쓰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졌는데,
이거라도 써야 할 수 밖에 없었던 라이프 편집부는 사진을 실으며
카파가 (전쟁터의 공포 등으로) 손을 떨어서 그랬을거라는 설명을 붙였습니다.
카파는 훗날 자신은 전혀 손을 떨거나 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덜 위험한 곳에 상륙 하기는 했지만, 전쟁터이다보니 상륙 과정에서는 필름 갈아끼울 시간이 없었다고.
이미지 출처: 매그넘 포토
후지컬러 MC-007
미녹스 8×11 판형에 대한 이야기는 이정도로 하고…
후지컬러 MC-007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후지컬러(후지필름의 브랜드명) MC-007은 후지필름에서 만든 카메라는 아닙니다.
OEM(제조는 다른 회사에서 하고 상표만 바꿔단 것) 제품인데, 아사누마상회(浅沼商会)라는 회사에서 만든 것입니다.
‘아사누마상회’는 자기들 주장으로는 1871년 창업한 사진 용품 회사입니다.
현대적 의미의 법인을 설립하여 회사 형태로 운영을 시작한 것이 1928년이니, 무려 100년 묵은 회사군요.
예전에는 회사 건물이 코니카 미놀타(현재는 카메라 사업부를 소니에 매각하여 사진 업계에서 완전 철수)와 바로 옆에 있어서 교류가 많았다고 합니다.
요즘도 사진 관련 용품을 유통하고 있고, 자체 브랜드 ‘KING’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사진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KING’ 로고가 찍힌 일제 사진 용품을 한 번 쯤은 본 적 있을 겁니다.
필름 카메라 시절, 한창 잘 나갈 때는 Aceml(아크멜)이라는 브랜드로 사진기도 만들고 했었습니다.
후지컬러 MC-007이 그 “잘 나갔었을 때” 만든 물건입니다.
1980년대 후반, 아사누마상회에서 제조한 Acmel MD의 OEM이 후지컬러 MC-007입니다.
Acmel 브랜드로 북미를 비롯한 해외에도 수출된 적이 있습니다.

후지컬러 MC-007은 여기서 색상이 다르고 설계가 약간 개선된 제품입니다.
44,800엔이라는, 지금 기준으로도 꽤 비싼, 살짝 맛이 간 가격표가 붙어있죠.
버블 끝물에 나온 물건이라 그렇습니다.
당시의 일제 광학 제품들은 놀라운 가격표가 붙어있곤 했는데, 버블이 꺼지기 전까지는 그래도 아주 잘 팔렸습니다.
이미지 출처: www.oldcam.be
MC-007 카메라 자체는 품질이 좋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거품 경제 끝물이던 시절 일본인들의 (나쁜 쪽으로) 정신나간 면모를 느낄 수 있는 제품입니다.
강화 플라스틱도 아닌 일반 플라스틱 재질 몸통에, 조작계나 거리 표시 글자도 그냥 인쇄를 해 놔서 손으로 문대면 지워집니다.
위 사진의 플래시 붙어 있는 Acmel MD는 44,800엔, 외장 플래시 없는 MC-007 모델은 당시 정가 29,800엔이었습니다.
10만원 짜리도 이렇게 만들면 욕 먹을텐데, 30만원 짜리 기계를 이따위로 만들다니 조금 나쁜 의미로 놀랍습니다.
자동 초점은 당연히 안 되고, 목측식입니다.
조리개 고정(f=3.5)이며, 필름 감도를 설정해 놓으면 노출은 자동(AE)이라 셔터만 누르면 된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크기를 빼면 장점이라곤 하나 없습니다.
카메라 자체의 성능이 열악하고 여기에 미녹스판 필름의 조잡한 화질이 합쳐지면 대환장 콜라보레이션…
그나마 앞서나온 Acmel MD는 조리개 값이 f=4.8이었던 것에 비해, 몇 년 후 나온 MC-007은 f=3.5로 약간의 개선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후지필름에서도 미녹스판 필름을 생산 하였으므로, 카메라 사용 자체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2023년 현재에는 수집용이나 사료(史料) 이외에는 의미를 찾기 어려운 카메라이긴 합니다.
후지필름에서도 이제는 미녹스판 필름을 생산하지 않습니다.
후지필름 한국 법인(롯데 계열사)이 있기는 하지만, 인스탁스 이외의 다른 카메라 필름 자체를 수입하지 않은지 오래…
한국에는 미녹스 필름을 파는 곳이 없다고 보면 됩니다.
미녹스 카메라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일단 필름부터 구해야 하는 난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해외 직구로 어떻게든 필름을 구했다면, 현상이 문제인데…
다행이 현상은 [포토마루]에서 가능합니다.
미녹스 카메라와 필름을 구해서 촬영을 했다면 포토마루에서 현상 할 수 있으나, 특성상 현상 비용이 비싸고, 위에 적은대로 현상 사고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현상 사고라도 나는 경우에 대비해 미녹스판으로는 중요한 사진을 찍는 건 피하는 게 좋을 겁니다.